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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3강 한국형 탈근대화현상의 현주소
2012.10.10  | 한세희
약 1년 전 “삼성과 안철수 신드롬”이라는 칼럼에서 당시에 급격히 불어닥친 안철수현상을 근대화가치에서 탈근대화가치로 이전하는 “탈근대화현상”으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를 일시적 거품으로 치부하였으나 지난 1년 동안 이 현상은 꾸준히 진행되어 왔고, 서울의 정치 지형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전국의 시골 곳곳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깊이 침투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196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탈근대화현상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기존질서와 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이에 정면으로 도전하였고, 결국 근대화가치를 대표하던 드골의 하야를 가져오며 사회 곳곳에서 근본적인 체제변화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당초 이 운동을 촉발한 사람들은 학생, 시인, 음악가 등의 문화엘리트들이었으나 다양한 계층의 근로자들의 동조를 이끌어내며 일반 대중에게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활동에 당혹해 한 것은 우익 세력이었던 집권 여당뿐이 아니었습니다. 공산당과 노동조합 등 좌익 세력 역시 기존 정치질서의 해체를 주장하는 이들의 주장을 무책임한 행태로 규정하고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드골 대통령이 이끄는 우익 정부와 긴밀히 협력하였던 것을 보면, 이 운동이 좌익/우익, 혹은 보수/진보의 전통적 양분법의 틀을 넘어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소르본느 대학교의 대자보에 붙었던 구호들을 보면 이들은 언뜻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가치들을 주창하였는데, 이들을 굳이 종합한다면 “품위 있는 삶”이라는 한 마디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돈을 더 벌려고 발버둥쳤고, 나도 뼈빠지게 일해서 돈을 벌어 TV, 냉장고, 자동차를 가졌지만 나는 여전히 불행하기만 하다”라는 표현에서 보듯 경쟁적 소비시장에서 떠밀리며 살아가는 덧없는 인생에 대한 자각이 그 근저에 놓여 있습니다. 이는 절대빈곤의 상태에서 외치게 되는 “우리에게 무엇이든 먹을 것을 달라”라는 구호와는 차원을 달리하며, 물질적 풍요의 시기를 이미 맛본 사람들만이 외칠 수 있는 한 단계 위의 정신적 가치로서, 오늘날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설명하기에 적합합니다.

어린 시절 6.25전쟁과 그 후유증을 겪으며 신변의 위협과 굶주림을 뼈저리게 체험한 기성세대들에게는, 다소간 위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치, 사회, 경제 체제는 미지의 불확실성을 감소시켜 주는 울타리와 같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개인적 삶의 질이 만족스런 수준은 아니더라도 지난 반세기 동안의 경제 발전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어린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것에 가치를 둡니다. 또한 경제의 확장기에 저절로 늘어나는 일자리의 풍요를 누리며 근면과 성실을 바탕으로 물질을 축적해 왔으므로 국가나 사회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 주어야 한다는 의식이 별로 없습니다.

이에 비해 보다 평화롭고 안전한 사회에서 태어나 끼니를 걱정하지 않고 자라난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가 이끄는 권위주의적인 위계사회 속에서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을 호소하고, 경제적 관심 역시 먹느냐 못 먹느냐 하는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사람들 간에 서로 비교하여 비참하게 만드는 상대적 빈곤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또한 근대화의 원숙기에 접어든 경제구조가 더 이상 확장하기 힘들어지며 새로운 기회가 점점 더 봉쇄되는 가운데 이제는 국가와 사회가 나서서 무언가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 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44년 전 프랑스에서 촉발된 탈근대화현상은 그 후 유럽과 미국, 일본 등의 선진국들에 영향을 주며 권위주의적 위계질서를 해체하고 보다 자유롭고 공정하며 수평적인 사회로 이끌었습니다. 아래로부터의 소통이 강화되며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는 정책들이 자연스럽게 도출되었고, 그 결과로 다양한 사회보장 정책들을 통해 복지 수준이 놀라울 정도로 강화되었습니다.

이는 그보다 한 세기 앞서 1880년대에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수립한 복지정책과 대조됩니다. 그는 1862년에 프러시아의 총리로 등용된 이후 근 30년 간을 철권통치하면서 수십 개로 쪼개어져 있던 게르만계 국가들을 독일연방의 기치 하에 통일하고 건강보험, 국민연금, 산재보험 등 당시에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첨단 복지 시스템을 건설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톱다운 방식의 관권으로 세워진 평화적 질서는 그와 같은 카리스마적 정치인이 떠나면서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얼마 가지 않아1, 2차 세계대전의 파국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탈근대화현상은 어린아이들이 신체적으로 충분히 자라고 나면 내적 성숙을 위해 사춘기를 겪는 것과 같이 근대화가 성숙한 결과로서 겪게 되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근대화 초기에는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면서 고도성장을 통해 국가경제의 몸집을 불리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하면서 물질적 확장에 몰두합니다. 하지만 그 흐름이 한계에 달한 후부터는 경제의 외적 성장이 정체되고 그 대신 내적 균형과 질적 성장이 새로운 목표로 대두됩니다.

사람들은 이제 서로 더 부자가 되기 위해 미친듯이 경쟁하는 것이 얼마나 바보스러운지 깨닫기 시작하여, 오히려 단순하면서도 품위있게 삶을 즐기는 데 초점을 두게 되고, 남과 비교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존감을 지키며 사는 “주관적 웰빙”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던 근대화현상과 반대로 도시에서 농촌으로의 이동이 시작됩니다. 이 중 일부는 생존을 위해 떠나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좀더 자유롭게 살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진정으로 자기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새로이 터전을 잡은 농촌의 이웃들이 도시민 못지 않게 경쟁적이고 물질적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들이 자연을 존중하고 누리는 대신 땅을 공장 다루듯 하며 수익 창출에만 집착하는, 근대화가치에 예속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갈등을 겪게 됩니다. 여기에 근대 이전부터 내려온 농촌 특유의 전통가치까지 혼재해 있는 시골은 3가지 서로 다른 시대정신이 경합하는 문화갈등의 현장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연유로 불과 10년 전만 해도 탈근대화가치를 가진 사람들의 귀촌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면서 기존 농촌문화와는 이질적인 자기들만의 독립된 문화공간들을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최근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베이비부머들의 귀촌과 더불어, 농촌은 이제 탈근대화현상이 가장 역동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장이 되었습니다.

탈근대화현상은 가장 보수적인 정당에서 가장 진보적인 정당까지 가리지 않고 기존 질서와 체제를 해체하고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도약하게 하는 기폭제로 작용하고 있으므로 이것이 특정 정당에 반드시 유리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그 후에도 수십 년 간 보수당과 진보당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집권을 이어 온 여러 선진국의 실상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40여 년 전 프랑스에서는 6.8사태 직후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이 실시한 총선에서 여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였으나, 그 다음 해에 있었던 국민투표에서는 이 승리를 잘못 이해하여 근대화가치로의 회귀를 시도하던 드골 대통령을 낙마시켰습니다.

이는 대선을 얼마 남기지 않은 한국의 모든 정치인들에게 좋은 타산지석이 될 것입니다. 탈근대화가치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여, 어떻게 철저히 기존 권위주의 질서를 해체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아래로부터의 소통을 실천하고 국민들이 존중 받으며 품위 있는 삶을 누리도록 돕는 사람이 국민의 지지를 받게 될 가능성이 커질 것입니다. 이는 단지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흑백논리를 넘어서는 정신적 차원의 도약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정치와 사회는 이제 지난 반세기 동안 복음으로 여겨졌던 근대화가치의 패러다임으로는 더 이상 해석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접어들고 있는데, 이러한 사춘기를 제대로 통과함으로써 비로소 선진국으로서의 성년기에 접어들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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